여행 풍경그림

통도사 무풍한송길

천성산. 2014. 1. 26. 18:00

 

 

 

통도사 무풍한송길

 

영남 알프스 어느 산으로 가다가 시간이 늦겠다 싶어 통도사 입구에 내려서

통도사 무풍한송길과 통도사 본찰 좌우측의 무성한 솔 숲길 동산을 한바퀴

돌았다. 무풍교 아래 구하스님의 글씨는 우연히 발견 했으며 검색 들어가서

고명하신 스님의 존재를 알게 되었다. 길가다가 큰 보석을 습득한 희열을

보았다.   

 

 

 

 

 

 

 

 뜻밖에 무풍교 아래 구하스님이 쓴 글씨(각자)를 발견했다.

 

流水千年通度寺(유수천년통도사)

落花三月舞風橋(낙화삼월무풍교)

 

통도사 흐르는 물이 어찌 천년만이든가

춘삼월 무풍교에 떨어지는 꽃잎 이 아니 장관이냐?

 

★구하(九河),스님

 

근현대의 고승. 호는 구하(九河), 자호는 취산(鷲山), 성은 김씨이다. 본관은 경주로 울주군 두동면 봉계리에서 출생했다. 13세에 양산 천성산의 내원사로 가서 주관(主管)을 은사로 출가하고, 경월(慶月)에게 사미계를 받았다. 1890년(고종 27) 예천 용문사 용호해주(龍湖海珠)의 강석에 참석했다. 여러 산의 노장들을 차례로 방문해서 교와 선에 능통한 후 본산으로 돌아와 부처님께 기도하는 생활에 소홀함이 없었다. 1906년(광무 10) 명진학교를 설립하고 교감ㆍ교장을 역임하면서 영재육성에 힘썼다. 또한 통도사 주지로서 1910년 한일합방 후 30본산 주지가 되었으나 사규가 점차 무너짐을 보고는 후진으로 물러나 있었다. 1919년 무렵 상해 임시정부의 재정이 매우 열악하다는 소식을 접하고 스님은 통도사의 재정으로 군자금을 지원했는데, 임시정부 국무총리인 안창호가 보낸 밀사에게 5천원, 경성 「화신공보」 사장 초월동조(初月東照)에게 2천원, 지암 종욱(鍾郁)이 군자금을 모집할 때 3천원, 독립운동가 정인섭에게 1천원 등 모두 1만3천원이었다.

 

이때 상해에서는 그와 성월 등이 함께 서명한 대한승려엽합회 대표자 12인 명의의 선언서가 살포되었으며, 이 선언서는 김규식이 파리평화회의에 전권대사로 갈 때 휴대했다고 전한다. 스님은 이 선언서에 ‘김취산’이라 서명했으며, 이후로 자호를 취산(鷲山)이라 하였다. 그러나 통도사 대중들이 그의 군자금 출현을 모르는 채 사재를 횡령했다고 주장하여 일경으로부터 고통을 당하기도 하였다. 1925년 주지직을 사임했으며 1965년 10월 3일 세수 94세, 법랍 81세로 입적했다. 구하스님의 시문과 금강산을 유람하고 쓴 기행문인 『취산문집(鷲山文集)』과 『금강산관상기(金剛山觀相記)』가 최근 후손들에 의해 출간되었다.

 

 

 

 

 

 

 

 

 

 

 

 

 

 

 

 

 

 

 

 

 

 

 

 

 

 

 

 

 

 

 

 

 

 

 

 

 

 

 

 

 

 

 

 

 

 

 

 

 

 

 

 

 

 

 

 

 

 

 

 

 

 

 

 

 

 

 

 

 

 

 

 

 

 

 

 

 

 

 

 

 

 

 

 

 

 

 

 

 

 

 

 

 

 

 

 

 

 

 

 

 

 

 

 

 

 

 

 

 

 

 

 

 

 

 

 

 

 

 

 

 

 

 

 

 

 

 

 

 

 

 

 

 

 

 

 

 

 

 

 

  ---- 끝 ---

 

2014년 1월26일

  

천성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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